카테고리 없음

[스크랩] 1차 대전, 일본의 야욕과 좌절(16)

黃遵守 2015. 12. 15. 01:13

바이칼 진출과 철수 

 

- 시베리아 간섭전쟁의 일원으로 블라디보스톡에 발을 디딘 일본은 직접적인 전투보다는 러시아 백군세력에 대한 적당한 지원과 존재감 과시가 목적이었던 타 연합국과는 그 목적부터가 판이하게 달랐음
- 일단 일본은 당시 중국 북부를 장악한 군벌 단기서(段祺瑞)에 대한 자금지원을 1917년 1월부터 1918년 9월까지 지속적으로 실시, 이에 따른 반대급부로 영토 양보와 권리를 인정받았으며 여기엔 이전의 독일의 조차지였던 칭타오와 자오저우 만에 더해 산동성 전체는 물론, 산동 철도의 제어 및 권리를 보장 받으며 중국에 대한 단속을 강화(돈으로 목을 조르는 이 짓은 실질적으로 일본 정부가 주도했으나 전면에는 니시하라 카메조(西原借款)라는 개인사업가를 내세워 위장했고 이러한 꼼수는 니시하라 대출이라 불린다..) 

                                     돈 빌렸다가 목줄 잡힌 만주군벌 단기서

- 이후 일본은 시베리아 지역에 대한 완전한 점령 내지 위성국가 건설이라는 팽창야욕으로 가득 차 거침없이 서진하였고 일본 육군은 애초에는 바이칼 호수 서쪽까지 진군, 시베리아를 완전히 차지하기 위해 7만 명 이상의 병력을 보낼 계획이었으나 미국의 격렬한 반대로 어쩔 수 없이 하향 조정, 육군 제 5보병사단 약 2만 명을 파견.
- 한편, 당시 바이칼 지역은 러시아 백군 계열의 만주특별파견대가(The Special Manchurian Detachment) 그레고리 세묘노프의(Grigory Semyonov) 지휘 하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 지역의 자원 확보와 영향력 확대에 당연히 지대한 관심이 있던 일본의 군사 지원 하에 이들의 세력이 급성장하게 됨. 

 

                   일본군의 진격 방향과 바이칼 지역 러시아 백군 지휘관 세묘노프

 
- 이들은 일본군의 지원 하에 1918년 봄, 바이칼 지역의 주요 도시인 치타(Chita)를 점령하기 위하여 대규모 공세에 나섰으나 실패했고 1918년 8월 25일, 일본의 시베리아 개입이 본격화되면서 일본군과 합세, 공략에 성공하고 이후 이 치타는 일본육군 제 5사단의 사령부가 들어서게 됨.
- 바이칼 지역을 점령한 일본군은 이후 1919년 봄, 지역 볼세비키 세력이 점점 성장하면서 빨치산에 의한 게릴라식 전투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이들의 세력이 마침내 러시아 백군 세력을 심각하게 위협하기에 이르자 당시 볼세비키의 근거지인 바이칼 동부지역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기로 결정. 

                           치타에 주둔한 러시아 백군 소속 코사크 병사들
- 이 공세에는 러시아 백군의 제 8 코사크(Cossack) 연대와 일본군 5사단 일부 병력을 더해 약 4,000명의 병력이 투입될 예정이었고 이들의 목표는 파벨 주라블레프(Pavel Zhuravlev)가 지휘하는 동 트란스바이칼 전선(Eastern Transbaikalian Front)의 사령부가 위치한 보그닷(Bogdat) 마을.
- 당시 이곳에 주둔한 약 2,000여명의 빨치산들은 이들의 공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단 하루 만에 보그닷 마을 주변은 일본군과 코사크 병력들에 의해 포위되었고 이 후 봉쇄는 더욱 강화되기 시작.
- 하지만 1919년 9월 29일부터 고립된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빨치산들은 혈전을 벌였고  마침내 10월 19일, 일본군과 코사크 군의 포위망을 뚫고 병력의 70%가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이 전투에서 볼세비키 측은 5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일본군과 코사크 측은 185명의 사상자가 발생(이 전투가 이 지역에서 벌어진 최대의 전투로 기록...) 

                                       당시 바이칼 지역의 파르티잔 지휘부 

- 한편,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일본군과 코사크 군은 지역 주민이 치를 떨 만큼 잔인했고 그 결과, 많은 지역 주민들이 빨치산에 합류하면서 이후 바이칼 지역의 러시아 백군과 일본군을 격퇴하게 되는 약 30,000명의 아무르 전선(Amur Front) 병력 대부분이 이 일본군의 탄압에서 벗어난 지역 주민들로 구성(역시 지 무덤 파는 데는 일본군만한 것들이 없다..)  
- 하지만 이런 바이칼 지역에서의 일본군의 득세도 오래가지 못해서 1919년 가을, 콜착 제독이 이끄는 우랄 서부의 러시아 백군이 적군과의 전투에서 대패, 1919년 11월, 러시아 적군이 옴스크(Omsk)를 점령하며 콜착 정권이 무너지자 이 지역에서는 세묘네노프가 러시아 동부 외곽 정부(Russian Eastern Outlying Districts Government)를 수립. 

                         1919년 겨울 무너진 콜착 정부와 그의 군대

 

- 그래봐야 얼떨결에 세운 급조 정부가 무슨 용빼는 제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1920년, 이젠 대세가 된 블라디미르 카펠(Vladimir Kappel)이 이끄는 30,000여명의 적군이 치타로 몰려오기 시작하자 현지 주둔 일본군과 백군 세력들은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고
- 일본은 1920년 7월 15일, 공고타(Gongota) 기차역에서 새로 설립된 러시아 극동공화국과 협정을 맺고 합의된 내용에 따라 일본군은 그때까지 자기들이 등을 떠밀던 세묘노프 정부는 쌩까고 방치해둔 채 이 지역에서 꽁지가 빠져라 후퇴. 

 

                    동쪽으로 진군하는 블라디미르 카펠의 적군과 극동공화국의 영토 
- 이렇게 1920년 10월 19일 일본군은 바이칼 지역을 떠났고 세묘노프의 군대는 10월 22일, 치타에서 퇴각했으며 이후 일본군은 다른 연합군이 다 떠난 뒤에도 1922년 11월까지 러시아 극동 지역에 끈질기게 주둔하며 어떡하든지 주워 먹으려고 갖은 쌩 쇼를 다 함.
- 한편, 일본군은 시베리아 현지 주민의 대일 감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뭐, 지네가 한 짓거리를 보면 더 잘 알겠지..) 현지 주민의 반일 감정을 되돌리기 위한 선무공작의 필요성을 느꼈고
- 이에 따라 이것들이 선무 공작의 전면에 내세운 것은 바로 일본의 종교 단체를 이용하는 것이었으며 일본 카톨릭와 일본 불교를 채택, 4명의 신부와 1명의 일본승을 공작원으로 삼아 1919년까지 활동하였으나 성과는 영 개판. 

                             블라디보스톡 역에 도착한 일본군
- 한편, 독일이 내부의 붕괴로 항복을 선언하자 1919년 1월 18일부터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 된 연합국과 동맹국 간의 평화 조약을 협의하기 위해 파리 강화 회의(Paris Peace Conference)가 개최되었고 일본도 한 건 개뿔도 없으면서 승전국의 자격으로 이 회의 탁상의 끄트머리에 끼게 됨.

<다음 편에 계속> 

 

<사진출처>

http://blogs.yahoo.co.jp/siauliu_bankas/folder/1039291.html?m=lc
http://www.takahashistamp.com/2note58.htm
http://en.wikipedia.org/wiki/Russian_Civil_War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The_Illustration_of_the_Siberian_War,_No._12,_Camping_of_the_expeditionary_army_in_Siberia_(LOC_ppmsca.08203).jpg
http://en.wikipedia.org/wiki/File:Korotayev.jpg

출처 : 봉달이의 삐딱한 전쟁사
글쓴이 : 봉달이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