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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차 대전, 일본의 야욕과 좌절(9)

黃遵守 2015. 12. 15. 02:01

칭타오 점령과 21개조 요구 

 

1. 군부 지향주의

- 1914년 발발한 제 1 차 세계대전은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평지풍파를 불러왔지만 특히 일본과 주변 열강들에 있어서 그 영향은 실로 지대했음(물론 열강들은 지네 앞마당에서 벌어진 전쟁 치른다고 정신이 없었기는 했지만..)
- 흑선 사건으로 강제로 개항을 하며 엄청난 쇼크를 먹은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서 오로지 군대만이 답이다 라는 쪽으로 근대화의 가닥을 잡았으며 모든 역량을 오로지 근대화되고 강력한 군대의 보유에 다 쏟아 부음(언제 또 흑선타고 코쟁이들이 쳐들어올지 몰랐으므로..) 

- 이에 따라 점점 군부의 힘은 커져만 갔고 일왕의 재가라는, 반론이 용인되지 않는 절대 권력을 무기로 끝내 군대가 정부의 권력보다 위에 위치하는 군부독재의 길로 나아갔으며
- 이는 비대해져 버린 군대의 필연적 존재 이유인 외국에 대한 힘의 과시, 즉, 팽창주의와 제국주의의 실천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져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조선과 대만, 북만주 일대를 영향권 하에 두며 서구열강의 식탁 말석에 한자리를 얻음. 

 

    1853년, 요코스카에 나타난 무시무시한 미국의 흑선과 1900년대의 근대화된 일본육군
- 1차 대전 이전만 하더라도 영국과 미국을 위시로 한 소위 앵글로 계열 열강들은 일본을 아시아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 가장 적절한 용병으로 여겼으며 특히, 영국은 일본을 동맹국으로 삼아 때론 겁도 좀 주고 때론 적당히 구슬리면서 케이크 한 조각씩 던져 주면 깨갱하면서 그들의 의도대로 행동을 보여주었으므로 이에 만족함(이이제이(以夷制夷)라고 하나?.. 대표적인 것이 러일전쟁..)
- 물론, 일본은 결코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으며(오랑캐가 스스로를 오랑캐라고 하는 거 봤나?) 1910년대에 접어들면서 싸가지가 없어진 그들은 탈아입구(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열강에 진입한다..)에 성공했다고 자화자찬하였고 드디어 어제의 멘토를 오늘의 동지를 넘어, 잠재적 적수로 여기기까지 이르게 됨(조폭영화에 많이 나오쟈나...키워놓으면 사시미 품고 오는 거..마이 묵으봤다 아이가~~??) 

             좀 컸다고 점점 싸가지가 없어지며 욕심만 커져가는 1910년대의 일본 군부

 

2. 칭타오 점령의 이면 
- 이런 찰나에 1차 대전이 발발하자 드디어 일본은 그 숨겨왔던 야심을 본격적으로 드러내었고 키워준 행님 사정은 안중에도 없이 지네 밥그릇 챙기기에 나섬.
- 일단 독일이 신경 쓸 수 없는 태평양 상의 제도들을 접수한 일본은 칭타오를 공략하여 집어 삼켰고 여기까지가 영국이 바라는 아시아에서의 일본의 역할이었고 이젠 유럽 전선의 참전을 기대하였지만 이미 영국의 바램 보다는 자신들 욕심 채우기에 급급했던 일본은 이후 형님들의 의심을 살만한 행동을 벌이기 시작. 

                      1차 대전 이전까지의 일본의 영향권
- 1914년 11월 7일, 칭타오 주둔 독일군이 항복하며 산동반도에 근거지를 마련한 일본은 완전히 칭타오를 점령하기 이전부터 자기 땅에서 발발한 전쟁에 중립 따위를 선언하며 칭타오 일대에 소위“교전지역”을 선언한 중화민국 원세개 정부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바로 교전 지역 밖으로 점령지를 확대(니넨 떠들어라 우린 한다~~)       
- 독일이 산동반도의 영향력을 확고히 하고자 건설한 교제 철도(膠済鉄道/산동 철도)가 독일군의 물자 수송에 이용된다는 이유로 10월 7일, 칭타오 서쪽 약 300km에 위치한 교제 철도의 종착역이자 산동성의 성도인 제남(済南)까지 진출. 

 

     제남철도의 장악(당시 일본군을 조약준수 따위의 일반적인 잣대로 보면 안된다는..)  
- 일이 이렇게 되자 당연히 중국 정부는 교전 지역에서의 이탈에 항의하며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했으나 이따우 얘기를 고분고분 들을 것 같으면 그런 짓을 했을 리 만무한 일본은 이러한 행위는 전시 국제법상의 군사 점령으로 독일이 관리하던 제남 철도와 부속 지역은 일본군이 관리해야하며, 독일의 조차권은 전쟁 종결 이후 중화민국에 반환 할 용의가 있다는, 눈 가리고 아웅 짓을 벌임(반환 할 짓을 모하러 하겠어? -_-;;)
- 이윽고 1914년 11월 중순, 일본은 독일의 조차지였던 칭타오와 자오저우만(膠州灣)을 점령함과 동시에 산동성의 독일 이권을 몰수하였고 이듬해인 1915년 1월 18일,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내각의 가토 다카아키(加蕂高明) 외무대신이 이 문제를 놓고 삐그덕대던 중화민국 대총통 원세개(袁世凱)에게 비밀리에 광범위한 이권의 요구를 들이댐. 

 

    당시 일본의 오쿠마 시게노부(와세다 대학 설립자) 수상과 가토 다카아키 외무대신

 

3. 21개조 요구

1) 요구의 내용과 경과 
-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21개조의 대중요구(対中要求)이며 여기에는 당시 일본이 1차 대전에 참전한 이유와 야심이 속속들이 담겨있었고 택도 아닌 요구로 가득 차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만 추려보면 
- 산동성의 독일 권익 양도와 철도부설권(산동반도 내 놔라~), 남만주와 내몽고(內蒙古)에서 일본의 특수 권익 승인(남만주하고 내몽고도 내 놔라~), 중국최대 제철소(漢冶萍公司)의 합작운영(우리로 치면 삼성이랑 현대, 포스코 내놔라~~), 중국연안과 도서지역의 불할양(이제 중국 전 해안의 항구하고 섬은 다른 놈 주지마라..우리 꺼니까~~), 중앙정부의 일본인 고문 초빙과 경찰의 공동관리(정부하고 치안도 우리 맘대로 할게~~), 일본산 무기의 의무구입과 철도부설(무기도 우리 것만 쓰고 철도도 우리 것만 써라~~) 등등(간단하게 말해 그냥 식민지 해라~~이거다..) 

 

                일본이 들이밀은 21개조 요구서와 할양 지역 및 이권의 개요도
- 이런 개 뭣같은 요구에 당연히 중국은 발칵 뒤집혔고 비밀리에 전달된 이러한 요구를 의도적으로 언론에 배포하여 비밀 요구서의 내용이 열강들에게까지 알려짐.
- 이를 본 열강들은 그제서야 자기들이 고양이 새끼인줄 알고 키웠던 게 범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전쟁으로 인해 정신이 없었던 동맹국 영국마저 남만주까지만 먹어라 라며 일본을 설득하였고 러시아는 당장 자신들의 아랫배인 내몽고를 먹겠다니 어이가 없었으며(이게 동맹국이 맞나 싶었겠지..) 특히 중립을 유지하던 미국의 반발은 극에 달해서 남만주 이남으로 일본의 세력 확대에 적극적으로 반발함(뭐, 이러한 반발들이 중국을 보호하고자 그런 건 결코 아니고...지네 먹으려고 아껴놓았던 떡이었는데 전쟁한다고 정신없는 틈에 쌈마이 일본이 설치니깐..)
- 이렇게 열강들이 들고 일어나자 일본은 잠깐 깨갱하며 움츠러드는 듯(아~짜슥이..비밀이랬쟈나~ 뭐 그랬겠지..) 했으나 5월 7일, 내정간섭에 관한 항목(일본인 고문, 경찰 공동운영, 무기 수입 등)을 제외한 나머지 항목을 수정 없이 수락하도록 강압적으로 최후통첩을 던졌고
- 1915년 5월 9일, 원세개 쓰레기 정부는 국회의 동의도 없이 모든 조건을 수락하였으며 5월 25일 이에 입각한 중일조약이 체결되어 6월 8일 양국간에 비준서가 교환됨. 

 

             황제가 되고팠던 쓰레기 원세개와 그가 수락한 일본의 요구에 대한 수락서 
- 여기엔 안 그럼 계속 중국 내륙으로 처 들어간다 따위 일본의 공갈협박과 1차 대전으로 인해 열강들이 목소리만 컸지 직접적인 행동으로 옮길 수 없다는 제약도 있었지만(제일 강경했던 미국도 이런 일로 일본과 전쟁 벌일 수는 없었다..) 결정적으로 중국황제로 등극시켜주겠다는 일본의 사탕발림에 눈이 뒤집어진 원세개의 욕심이 크게 작용(황제 좋아하네..이래놓고 나라를 중화제국이라 하고 지가 황제라고 떠벌리기까지 했다..이래서 영감들의 개 거러지같은 욕심에 나라 말아먹는 꼬라지를 또 보게 된다는..원세개 꼴통은 다음해 바로 요단강을 건넌다..결론은 또 국민들만 죽어난다는..)     
- 원세개는 당연히 국민들의 반발을 예상했고 자기 자리 보존에 급급해 외부적으로는 일본의 횡포라고 비난하며 중국 국민의 단결을 호소하고 자빠졌지만 그 속을 빤히 알던 중국 국민들은 이를 열라 비난하며 일본의 요구를 수락 한 날(5월 9일)을 국치일이라 불렀고 손문은 “21 개조 요구는 원세개 자신에 의해 요청 된 책략이며, 황제임을 인정받기 위해 그가 일본에 지불 한 대가다”라고 단언(이는 뒤에 우리 3.1운동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중국 5.4운동의 원인이 된다...)

 

     83일짜리 황제 원세개와 1919년,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중국의 5.4운동

 

2) 고양이가 아니라 범  
- 한편 21개조 요구로 비롯된 일본의 노골적 팽창주의는 이후 1차 대전을 거치면서 드러난 일본의 행태(유럽 전선 참전은 거부하고 자기 잇속만 찾는다..)와 맞물리며 열강들에게 경각심을 가져왔으며 특히 미국은 영국에 대해 영일동맹의 파기를 주장(우리랑 놀래, 일본이랑 놀래? 우리는 쟤 못 믿겠다..뭐 그런다는..)하는 여러 원인들 중 최초의 사건으로 인식되었고 영국 또한 일본과의 동맹에 의구심을 표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지만
- 이제 밥그릇 챙기기에 눈이 멀어버린 일본 군부는 그딴 거 신경 쓰지 않고 까불다가 1차 대전의 종전과 함께 국내에 불어 닥친 민주화 바람과 이전과는 다른 열강들의 경계에 찌그러지며 잠깐 동안이나마 자숙기간을 가지게 되지만 이때까지는 깝죽거리기 바빴음.

<다음편에 계속> 

 

<사진출처>

http://maps.omniatlas.com/eastasia/19150118/
http://www.ne.jp/asahi/koiwa/hakkei/21kajyou.html
http://heiwa.yomitan.jp/4/3231.html
http://www.ss.iij4u.or.jp/~nfuji/index.fuzoku.htm
http://ja.wikipedia.org/wiki/%E3%83%95%E3%82%A1%E3%82%A4%E3%83%AB:JapaneseArmy1900.jpg
http://en.wikipedia.org/wiki/File:Takaaki_Kato_suit.jpg
http://en.wikipedia.org/wiki/File:Okuma_Shigenobu.jpg


출처 : 봉달이의 삐딱한 전쟁사
글쓴이 : 봉달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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