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스크랩] 1차 대전, 일본의 야욕과 좌절(7)

黃遵守 2015. 12. 15. 02:04

신개념 전술의 시현-칭타오 공략(上) 

 

1. 칭타오 공략의 배경

- 1914년 8월 15일, 독일에 최후통첩을 날린 일본은 형식적인 답변기간인 일주일이 지나도 독일이 답변하지 않자 8월 23일, 독일에 선전 포고를 감행.
- 영일동맹을 핑계 삼아 참전을 결정하긴 했지만 일본은 유럽대륙의 전쟁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그들의 목표는 전쟁으로 인해 아시아에서 유럽열강들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 콩고물을 주워 먹는다는 것이었으므로(이때 한번 재미 본 걸 가지고 이것들은 2차 대전에서 또 다시 남방작전과 태평양 전쟁 개전이라는 자살극을 벌인다..) 그 첫 번째 목표인 중국내 독일 세력의 근거지, 산동반도의 칭타오(青岛) 점령 작전에 곧 바로 착수.
- 칭타오 점령은 독일 동양함대의 격파라는 영국의 이해와도 일치하는 목표였으므로 영국과 동맹국은 이 작전에 바로 동의하였고 밥그릇을 앞에 놓고 얼마나 급했으면 일본 내각은 선전포고도 이루어지지 않은 8월 16일, 육군 제 18사단장 카미오 미쓰오미(神尾光臣) 중장에게 칭타오 공략에 대한 준비에 착수하도록 명함. 

 

          칭타오 공략의 주역, 일본 육군 제 18사단과 사단장 카미오 미쓰오미(神尾光臣) 중장
- 한편, 독일 동양함대의 근거지 칭타오는 독일제국으로 통일되기 전 프로이센 시절인 1860년부터 독일이 눈독을 들이고 있던 이상적인 군항지로 독일은 다른 유럽 열강에 비해 중국에 발판을 구축하는 것이 늦었으므로 다른 열강의 손이 닿지 않은 지역을 물색하던 중, 최종적으로 산둥 반도를 낙점하고 있던 차에
- 1896년, 청일전쟁이 종전되고 삼국간섭으로 청나라에 나름 힘을 실어주며 외교적 힘을 키운 독일은, 1897년 11월 1일, 독일인 선교사 2명이 현지인에게 살해당하는 사건(거야사건Juye incident)이 발생하자 이를 빌미로 11월 14일, 자오저우만에 상륙, 군대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띨띨이 군대, 청군 1,000명에게 퇴거를 명하고 전투도 없이 자우저오 만을 점령(요동반도를 빼앗긴 일본은 독일이 이따우 짓을 벌이자 이때부터 복수의 칼을 간다는..) 

 

                   거야사건과 1898년 칭타오의 청나라 군영을 점령한 독일 해병대
- 이후 청은 선교사 살해에 대한 배상금을 독일에 지불하고 이곳에 주둔한 독일군의 철수를 계속 주장하였지만 당연히 독일은 모르쇠로 일관했고 결국 1912년 3월 6일, 양국은 독청조약을 맺어, 예전 영국의 홍콩조차나 프랑스의 광저우만 조차의 예를 따라 다른 열강들에게 뜯긴 것처럼 칭타오와 자오저우만도 99년간 독일에 조차하며 주변지역의 2건의 철도 부설권과 광산 채굴권도 양도.
-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이곳의 회복을 위해 청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감행했는데 일본이 달려들자 청의 쓰레기 정부 원세개 내각은 바로 중립을 선언하는 개 꼴통짓을 벌임(지네 나라에서 지네 땅을 놓고 벌이는 전쟁에서 중립이라니..하긴 청일 전쟁 때 우리도 그랬으니..정신 좀 차리자..-_-;;) 

 

칭타오의 독일 총독부 건물과 지네 땅의 전쟁에서 중립을 외친 꼴통 오브 꼴통 원세개

 

2. 방어태세와 공략준비     
1) 항만봉쇄

- 이후 칭타오는 독일에게 있어 아시아의 가장 중요한 군사기지가 되었고 1914년 1차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독일 동양함대의 주력이 주둔한 근거지였는데,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감행하자 항구의 봉쇄를 우려한 동양 함대 사령관 막시밀리안 폰 스피( Maximilian von Spee) 중장은 주력 함대를 빼내 태평양을 가로질러 본국으로 향했지만 칠레의 콜로넬 해상에서 조우한 영국함대는 물리쳤지만 포클랜드 인근 해상에서 또 다시 영국함대를 만나 괴멸됨(끈질기다 영국..포클랜드 해전)
- 주력 함대가 빠져 나간 칭타오에는 수뢰정 S-90과 소형포함 일티스(Iltis),야거(Jaguar), 티거(Tiger), 룩스(Luchs)와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의 장갑순양함 카셀린 엘리자베스(Kaiserin Elisabeth)만이 항내에 남아있었으며 육상전력으로는 총독이자 해군 대령인 메이어-발덱(Alfred Meyer-Waldeck) 지휘 하의 독일 해병대 병력과 소수의 수병을 포함 약 3,625명만이 주둔.
- 독일은 칭타오 항만과 항구를 둘러싼 고지대에 17km에 이르는 참호선과 각종 포대로 방어선을 구축하였고 해상으로 접근하는 함대에 대한 대비책으로 항만입구에 대한 기뢰부설은 물론 30cm 2연장 4기의 강력한 해안포와 5개의 요새를 구축.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의 장갑순양함 카셀린 엘리자베스와 칭타오 요새선

- 한편, 칭타오 공략을 위해 일본 해군은 가토 사다키치(加藤定吉) 중장의 지휘아래 러일전쟁시 획득한 구식전함 스우(周防 러시라 함명:Pobeda)를 기함으로 항만봉쇄 함대를 구성했으며 여기엔 당시 일본 해군의 최신예 신조 함정들인 전함 가와치(河内), 셋츠(摂津), 순양전함 공고(金剛), 히에이(比叡)는 물론, 이 전투에서 최초로 등장, 획기적인 활약을 보인 수상기모함 와카미야(若宮)도 포함.
- 영국 해군도 이 작전에 적극 협력했는데 싱가폴을 모항으로 하는 동중국함대 소속 구식전함 트라이엄프(Triumph)와 구축함 어스크(Usk)가 이 봉쇄함대에 가담. 

 

                    칭타오 항만 봉쇄 함대의 기함 전함 스우와 파견된 영국 전함 트라이엄프

 

2) 수상기 모함 와카미야(若宮)

- 미국이 1911년, 순양함 버밍햄에 임시로 가설한 항공갑판을 이용, 세계 최초로 함선에서 항공기의 발함에 성공하자 가뜩이나 함선에서의 초계·정찰 임무를 위한 수상기의 이용방법을 연구하던 영국 해군은 1912년 1월 전함 아프리카(Africa)을 개조, 최초로 항공기의 발함에 성공.
- 이에 탄력을 받은 영국 해군은 1913년 3월 순양함 허미즈(Hermes)를 개조, 수상기 3대를 탑재, 운용할 수 있는 최초의 수상기 모함을 건조하기에 이르고 이를 본 영국해군 따라쟁이 일본 해군 또한 엄청난 감동을 먹고서 이를 써먹어보기로 결론 내림(어라~? 그럼 우리도 해 보자..뭐, 그런 식..)  

 

        영국 해군 최초의 수상기 발진 실험함인 전함 아프리카와 수상기 모함으로 개조된 허미즈
- 이에 따라 일본 해군 최초의 수상기 모함으로 낙점된 배는 러일 전쟁 당시인 1905년, 쓰시마 해협에서 나포 된 러시아 선적의 화물선 레신턴(Lethington)으로 영국에서 건조된 이 배는 배수량 7,700톤에 석탄을 이용하는 스팀엔진 구동이며 속력 10노트의 저속선.
- 일본 해군은 1913년에 임시로 수상기 3기를 탑재하고 훈련에 참가시켜 가능성을 체크한 뒤, 이듬해인 1914년, 수상기 모함으로의 개조 공사를 실시. 

- 말이 수상기 모함으로의 개조지 사실 별 것도 없어서 함수 부분에 수상기 저장고 혹은 탄약고, 함미 부분에 같은 형식으로 화물저장고나 병원실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갑판에 캔버스 제질의 텐트형식 캐노피를 설치한 간단한 개조.
- 탑재 수상기는 프랑스제 파르망(Farman) MF11으로 전후 갑판에 각 1기, 저장고에는 분해하여 2기, 총 4기를 탑재 할 수 있었고 수상기의 발함은 캐터필터나 갑판 활주형식이 아니라 크레인을 이용하여 해상에 내린 후 수상활주 시키는 방식이었음. 

 

- 와카미야 제원

배수량: 7,720 tons (7,844 t)
전장: 111.25 m
전폭: 14.6 m
기관: VTE 엔진, 보일러×3, 1축 1,590마력(1,190 kW)
속력: 10 노트 (12 mph; 19 km/h)
승조원: 234명
무장: 2 × 3.1 인치 (79 mm)/40 DP 함포
     2 × 47 mm 대공포
탑재기: 4 × Farman MF.11 수상기

 

3) 육군의 상륙

- 카미오 미쓰오미(神尾光臣) 중장 휘하의 일본 육군 제 18사단 23,000명과 각종 화포 142문으로 구성된 일본의 칭타오 침공군은 1914년 9월 1일, 첫 선발대의 도착을 시작으로 칭다오 반도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 

 

                  일본을 떠나는 칭타오 침공군과 산동반도에 상륙하는 모습
- 이 침공군에는 영국 정부와 동맹군이 일본군과 협조 하에 이루어지는 작전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하여 항만봉쇄 함대에 합류한 영국 해군과는 별도로 영국 육군 바나디스턴(Nathaniel Walter Barnardiston) 준장 지휘로 영국 사우스웨일즈 보더러 연대 2대대 병력 1,000명과 인도 시크 보병연대 500명이 합류.
- 이들은 칭타오로부터 30여 키로 떨어진 랴오샨 만에 상륙하였으며 9월 18일 전병력의 상륙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칭타오를 공략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

<다음편에 계속> 

 

 

 

<사진출처>

http://i2.wp.com/world-war-one.net/wp-content/uploads/2014/10/jap-siege-ari-tsingtao.jpg
http://www.hazegray.org/mysteries/oldmyst/pic01.jpg
http://fishstickmonkey.tumblr.com/post/58487248112/hms-ark-royal-1914-the-first-ship-in-history
http://forumeerstewereldoorlog.nl/viewtopic.php?t=12500
http://www.chinarhyming.com/wp-content/uploads/2014/04/The-Aviator-of-Tsingtao-cover3-510x765.jpg
http://i2.wp.com/world-war-one.net/wp-content/uploads/2014/10/jap-siege-ari-tsingtao.jpg
http://de.wikipedia.org/wiki/Datei:Siege_of_Tsingtao,_soldiers_of_IJA_18th_division_took_over_german_trench_Kopie.jpg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Juye_incident_drawing_e_regler.jpg
http://en.wikipedia.org/wiki/File:Bundesarchiv_Bild_116-125-01,_Tsingtau,_Haupttor_des_Artillerielagers.jpg
http://en.wikipedia.org/wiki/File:SMS_Kaiserin_Elisabeth.jpg
http://en.wikipedia.org/wiki/File:HMSTriumph-IWM-Q40369.jpg
http://www.warbirds.jp/kakuki/kakkan/kakukan2/wakamiya_jw.htm
http://www.kenthistoryforum.co.uk/index.php?topic=3203.0
 

출처 : 봉달이의 삐딱한 전쟁사
글쓴이 : 봉달이 원글보기
메모 :